빠져나올 수 없는 <돈의 맛>

* 스포일러 있습니다

2년전 같은 시기에 <하녀>(2010)가 개봉된 것을 상기시켜봐도 <돈의 맛>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감독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 <하녀>는 좀처럼 소화하기 힘든 이물감이 심한 덩어리였다. 형체가 모호한 덩어리여서 해석 여부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그것이 임상수가 원한 것이었다면 스스로에게 흡족한 작품이었을테지만 어떻든 <하녀>는 불충분한 영화였다. 영화가 건드린 것과 보여진 것의 차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돈의 맛>이 만들어졌다. 가장 주요한 이유는 지금 현재의 한국을 읽는 데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게 만드는 결정적인 것은 내 경우는 완벽한 걸작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결국 단 하나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영화에서 발견하길 원하는 것이다. 

<돈의 맛>의 성인용 예고편을 보고 짐작하기엔 허세가 심하겠군요 라고 판단했다. 임상수가 노골적으로 세속적인 표현을 쓰며 '떡' 전문 감독임을 강조할 때부터 그의 영화가 이상하게 이물감이 심한 느끼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지도 않는 영화 <돈의 맛>에 대해 '본격 떡 영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도 되겠다고 장담했다. 예고편에 흐르는 대사의 직접적인 노골성을 봐라. 얼마나 번지르르한가. "가만 있어"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하세요. 어디 안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윤여정부터 김효진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니 있는 대로 허세를 부린 포스터와 예고편 그리고 언플로만 보면 <돈의 맛>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아니 상상한 그대로를 보여주는 최상류층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는 본격 떡 영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돈의 맛>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들 수 밖에 없는 낭패감은 돈에 대한 경험의 부재 아닐까. 소시민이 매달 겪는 고충의 돈의 액수가 이 영화에서는 통할리 없다. 조단위의 돈이 입밖으로 오고가는 상황에서 과연 그 액수를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또는 과연 조라는 단위의 숫자를 실감할 수나 있겠는가. <어벤져스>의 현재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정도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체감할 수 있을까. 어렵다. 그 한계가 명백하니 이 영화를 볼 진짜 타켓은 영화와 같은 몇 프로에 해당되는 최상류층일지 모른다.

<돈의 맛>은 상상력이 부족한 영화다. 오히려 누구나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문제는 감독이 그것을 관객에게 지켜보게 해줘도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불감증에 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돈의 맛>에서 더 자극적이고 대담하게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서 폭로하는 방식으로 그렸다면 관객들이 원하는 신파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에 흔들릴 관객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단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다시 말할 때 그 이야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무시무시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당해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그저 남일처럼 구경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임상수 영화는 한 장면을 집요하게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돈의 맛>에서도 몇 장면을 오래 끌었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여지없이 커트하는 임상수만의 방식. 

나는 여기서 <돈의 맛>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나 최상류층의 부도덕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다고 여긴다. <돈의 맛>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돈의 맛>의 화자가 누구인지 감독의 누구에 편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조금 더 근사하고 멋지게 캐릭터가 잡혀있는 백금옥, 백여사(윤여정)과 윤회장(백윤식)을 보여주기 <돈의 맛>은 낭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엔딩의 두 인물 주영작(김강우)와 윤나미(김효진)을 끝까지 따라간다. 엔딩이 삭제해야하는 낭비였을까. 쿨하지 못한 감독의 결정이었을까. 요즘 관객들은 그런 것 쯤은 눈 감고도 알만한 정말 쿨한 상태인가.

나는 엔딩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돈의 맛>을 본 상영관이 제일 후진 곳이었고 스크린이 작은 관계로 4번째 줄 중앙에 앉아 최대한 스크린과 가깝게 영화를 봐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작의 얼굴에 쏟아지는 비에 눈을 뜰 수도 없는 상태가 여러번 잡힌다. <돈의 맛>의 수많은 대사와 공들인 화면의 미쟝센보다 오히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닌가 싶었다. 비는 왜 내리는가. 관습적이고 진부하지만 한국에서 돌아와야 하는 엄마 에바(마우이 테일러)를 기다리는 필리핀의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비는 쏟아져야 한다. 그러나 비가 꼭 그 아이들의 마음만을 표현해준 것일까. 

영작은 최소한의 양심으로 자신들이 빠져들었던 돈이라는 늪에서 나오기 위해 필리핀행을 떠난다. 영작의 마음을 헤아린 나미는 뒤따라 와서 동행자가 된다. 영작이 에바의 관을 실고 도착한 아이들은 탁아소인지 고아원인지 불분명한 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에바의 딸 아이는 간단한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상태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영작은 모든 것을 나미에게 맡긴 채 그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서있을 뿐이다.

영작은 왜 필리핀으로 향한 것인가. 그는 잠시나마 빠져있던 그곳을 벗어나 조금이나마 죄의식에서 벗어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도한 곳의 현실을 보자 그조차도 자신의 오만이자 사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는 행위에 대해 대신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아니다.

비는 아이들을 위해서 내린 것이 아니다. 영작을 두드리는 세찬 비는 그에게 밴 돈이라는 오물을 씻겨내기엔 역부족이다. 차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이 내리는 빗줄기임에도 영작은 분명 그것을 그 순간 인식한다. 나는 깨끗해질 수 있을까. 나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여전히 <돈의 맛>은 개운하지 않다. 나미는 그들 가족에 비해서 돈에 덜 오염된 인물이지만 그녀는 괜찮은가. 그녀는 얼마나 그들 가족과 다를 수 있는가. 

필리핀으로 오면서 나미와 영작은 비행기 화장실에서 입은 채로 섹스를 한다. 영작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반쯤은 돈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방금 떠나온 그 세계의 인물과 몸을 또다시 섞는 것이다. 이건 안전한가. 믿을 수 있는가. 

<돈의 맛>의 약점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 윤회장은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필리핀 하녀 에바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만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이 장면은 등장하는데 아직 윤회장과 에바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 장면만 두고 보자면 이 가족들은 윤회장의 손버릇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으면서 묵인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외국인 하녀의 육체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언제든지 범할 수 있는 대담무쌍한 가족들의 풍경. 그렇게 그 장면은 읽혀지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윤회장은 깨우침을 얻는 것처럼 소박한 에바와의 사랑을 원한다. 여기서 타자에 속하는 에바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정력가인 윤회장과의 섹스에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로 그려지고 그녀는 자신의 학벌과 상관 없이 이 사랑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필리핀에 있는 자신의 두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이라면 감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영작과 나미에게 이야기한다.

에바는 정말 윤회장의 입장과 동일한가. 알 수 없다. 에바야말로 임상수의 <하녀>의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이용당하고 즐기고 스스로 화형 당하는 은이(전도연)과 비슷한 맥락으로 자본가와 몸을 섞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임신을 한다.

팀 버튼의 <다크 섀도우>(2012)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2세기를 관에 감금되었다 풀려난 바나바스 콜린스가 피에 굶주려 1970년대 히피들 무리에 끼었을 때 여자가 원하는 것이 양과 돈이었다는 자신의 시대에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겠냐고. 바나나스 옆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맹한 눈동자의 소녀는 여자는 남자의 사랑이면 그만이라고 대답한다. 히피 무리들은 일제히 동조한다.

그렇다면 에바는 윤회장의 식탁에서의 손버릇과 가족들이 뻔히 있는 대저택에서의 은밀한 섹스가 여성으로서 온당하다고 여겼을까. 윤회장의 방식이 사랑받는 여자가 받을만한 행동이었다고 보는가. 물론 이 관계에서 에바가 윤회장을 사랑했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윤회장이 그보다 더 한 것을 요구해도 그들의 계급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이런 남자들의 여성혐오적인 사랑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맛>의 진짜 주인공은 백여사가 살고 있는 대저택이다. 나미의 입을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타 죽은 하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200조가 넘는 돈을 가진 자본가가 사는 주택의 역사다. 여기는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빠져나가기 힘든 돈이라는 지옥의 세계다. 돈에 감금된 대저택은 고가의 미술품이 전시된 갤러리의 모습을 띄고 있고 바닥은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근사하게 실내의 온도를 유지하는 벽난로부터 고가의 가구들로 진열되어 있다. 그들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최대치의 것들을 보여주고 그것에 철저하게 종속된 삶을 산다. 그래서 백여사도 윤회장도 윤철(온주완)도 특별한 악인의 포스를 풍기지 않는다. 백여사의 아버지 노회장(권병길)이 쓰는 언어가 일본어이고 백여사 집안에서 한국어와 반반으로 섞어쓰는 언어가 영어인 점만 보더라도 이들의 사고방식은 한국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관습에 얽매이는 기존의 한국 가족의 답답함이 쿨하게 보여지기도 하고 다른 점에서는 실감할 수 없게 대담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일본어를 쓰는 거동이 불편한 유령이나 다름없는 노회장을 보면서 부의 축척의 역사가 일제 식민지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의 부만 축척한 남자의 유일한 상속작가 딸이라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녀>(2012)에서 자본의 권력을 움겨쥔 절대적인 인물은 훈(이정재)이었다. 남자였단 말이다. 왜 한국 자본가를 추적한 연작 <돈의 맛>에서는 그 상속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을까. 대선을 앞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슬며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한국 근대사 유령과 같은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누군가를 빼닮았다. 백여사는 자본을 지켜내기 위해 능력 좋은 남편 윤회장과 결혼하지만 돈의 모욕을 느낀 윤회장은 외도를 통해 그 돈으로 백여사에게 모욕감을 심어준다. 돈과 거래한 현대판 한국의 파우스트라 할 수 있다. 백여사의 프라이버시한 섹스 라이프는 그들이 부리는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을 슬쩍 건드리면서 유지된다. 주영작은 백여사가 윤회장의 외도로 외롭고 불행한 늙은 여자일 뿐이라고 위장한 거미줄에 걸려든 힘없는 벌레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여사의 삶을 보자.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대저택에 감금된 인물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교육받은 후계자가 아닌가. 돈을 지키내고 있는 파수꾼으로서는 유능하나 자신의 아랫도리를 간수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쩌다 일하는 젊은 남자를 건드리고 그들을 자신이 사업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다. 완전히 여왕벌같지 않는가. 백여사 가문이 이끄는 대기업의 총수들은 모두 그녀와 동침한 전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섹슈얼리티를 상실한 이 가문의 불행은 나미에게로 되물림된다. 결혼하고 20번 정도 섹스를 나눈 것이 고작인 30대 중반의 나미는 그녀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엄마와 이미 몸을 섞은 남자들을 유혹한다. 이 모녀들에게 돈을 넘쳐날지 모르지만 자신을 보호해줄 진정한 남자는 없다. <돈의 맛> 백여사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확실한 것은 그녀는 독실한 아버지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사랑받길 원하는 굿 걸. 사랑을 원하는 데 아버지는 돈을 주고 그녀는 돈을 지켜내기 위해 사랑을 산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적인가 라는 질문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마도 가장 극지점에 위치한 것이 에바의 죽음일 것이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흔들리는 영작에 대한 협박과 고문일 것이다. 얼마든지 너하나쯤은 모르게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권력. 그 무시무시함은 영작의 얼굴을 비닐로 쓰인 채 김기영의 <하녀>가 뒤쪽의 스크린에 상영되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른쪽 광대뼈의 상처와 입술의 찢어짐. 숨막히는 공포를 제대로 구현해냈다. 

영화 <돈의 맛>은 그 돈으로 살고 그 돈을 지켜내는 자본가의 모습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에 대해서 질문해봐야 옳을 것이다. 백여사의 대저택. 그 안에서는 살인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죽음이 이미 만연된 공간이다. 죽음은 언제나 쉽게 처리되는 곳.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물들이 사는 곳. 자신들이 사는 그 고상하고 우아한 공간에서 죽음은 일사천리로 일어진다는 사실. 

에바가 실내 풀장에서 죽어 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절대 권력의 백여사는 몸서리 치게 악마적이다.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의 남편을 빼앗은 여자의 죽은 육체 앞에서 당당하게 위세를 부린다. 거기에는 공포도 없고 최소한의 존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돈의 맛에 길들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면역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다. 

임상수의 <돈의 맛>의 탁월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돈의 맛을 어떻게 보여줬냐고. 돈의 세계가 죽음으로 통하는 직접적인 통로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돈은 곧 죽음을 뜻하고 그 죽음에 취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온다. 돈이 돈을 모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죽게 만들고 더 많은 죽음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척이란 결국 사람들의 피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달간 해외에서 머리를 식히고 오면 받아주겠다며 돈봉투를 건네는 백여사의 제의를 물리치는 영작은 말한다. '질식해버리겠다'고. 영작은 산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와 가까이하는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돈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말하는 윤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에바와 외도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나려 했지만 백여사에게 발이 묶이게 된다. 그는 다시 백여사의 저택으로 돌아가 그 자신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목에 칼을 그은 채 욕조에 몸을 담근다. 결국 그의 장례식은 그 대저택에서 치뤄진다. 그의 몸과 영혼이 영원히 그 대저택에 감금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란 말인가.

<하녀>처럼 특유의 임상수의 방식으로 <돈의 맛>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눌러담고 재차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면서 영화를 끝마쳤다.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그 악취를 과연 씻겨낼 수 있을까. 그 남자에게 과연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작은 세찬 비를 받고 필리핀의 고아가 되어버린 두 아이 앞에 서 있다. 이제 그 남자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돈의 맛>은 끝까지 영작에게 묻고 있다.

다시 <하녀>의 은이(전도연)로 돌아가보자. 임상수는 <하녀>(2010)의 마지막에서 은이가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고 죽는 장면을 넣었다. 전후 맥락을 보더라도 이 장면은 좀 느닷없이 끼어맞춘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다. 왜 은이는 자신이 몸에 불을 질렀을까. 자살하는 여러가지 방법은 그녀는 여기서 두가지를 선택한다. 하나는 목 매달려 죽는 것이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흡사 중세 시대의 마녀의 처형 방식과 동일한 이 방법을 왜 은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돈의 맛>에서 윤회장(백윤식)은 그 은이가 죽기 직전에 몸을 담았던 욕조에 앉아 손목을 긋는다. 자신의 피로 몸을 담그면서 그의 몸에서는 모든 피가 빠져 나간다. 

왜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속죄인가. 또는 무엇을 부인하는 행동인가.

은이는 자신을 농락한 훈과 그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흡사 훈의 가족들이 바라는 대로 은이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왜 은이는 자신의 몸에 극심한 고통을 주며 죽음을 불사르는가. 그녀는 충분히 깨닫지 못한 백치처럼 <하녀>에서 그려진다. 그녀의 이전 삶이 어떻든 상관없이 은이는 훈의 저택에서 삶을 즐기는 듯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충분히 훈이 상징하는 세계의 속성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그 세계의 맛을 훈과의 섹스를 통해서 즐겼기 때문이다. 훈이 원하는 대로 그 세계의 쾌랙을 맛 본 자신. 그들이 벌하기 전에 자신을 벌해야 한다고 깨달은 은이. 그래서 자신의 몸에 밴 그 쾌락의 진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죽지만 내 육체는 불로 그 죄를 씻겨낼 것이라는 선언. 은이는 죽음의 방식을 통해서 그녀 스스로에게 구원의 기회를 준다. 가장 끔찍한 형벌로서. 

그러나 이 '하녀'의 은이의 죽음은 윤여사 가족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돈 앞에서는 한맺혀 죽은 여자 귀신조차도 무기력할 뿐이다. 그 죽음을 계기로 이 대저택에 들어온 자들. 돈이라는 악과 거래한 사람들은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하녀>와 <돈의 맛>은 연속적으로 돈이라는 본질에 대해서 묻고 있다. 죽음을 불러내는 돈의 세계는 지옥을 허락한 공포 그 자체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 <돈의 맛>의 주영작(김강우)은 그 죄를 씻기 위해 필리핀으로 간다. 한국 자본가의 거대한 돈은 아시아의 후진국에 속하는 필리핀의 하녀에게까지 이제 손을 뻐친 상태다. 과연 돈의 위력이란 이런 것이다. 거기서 주영작은 기적처럼 비를 만난다. 이미 그 세계를 빠져나왔다고 믿었지만 그 스스로에 대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주영작은 자신의 몸을 때리는 비를 통해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이 남자는 살아가야 한다. 돈 없이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주영작이 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돈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딸 나미와 떠나버린 주영작을 바라보는 돈의 늙어빠진 몸뚱아리가 있다. 백여사(윤여정). 한국 영화에서 늙은 여자의 섹스에 대해서 그린 작품이 많지 않다. 늙은 여자의 섹스는 언제나 이 사회에서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금기의 것이었다. 봉준호의 <마더>(2009)에서는 늙은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계급과 어머니(김혜자)라는 관점으로 풀어냈다. 엄마가 섹스를 원할 때 그 자리에는 죽음이 도사린다. 왜냐하면 엄마의 섹스를 상상하는 아들에겐 그것이 금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급적으로 작은 시골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모자의 이야기로 그려진다면 더이상 가망이 없다. 그 금기는 모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산 자의 지옥같은 이생. 그러니 미쳐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돈으로 세상과 사람을 살 수 있는 <돈의 맛>의 백여사에게 섹스는 무엇인가. 그녀는 쉽게 젊은 남자와 몸을 섞는다. 모르는 척 은근히 젊은 남자들에게 말한다. 니들이 하는 원 나잇 스탠드라고 생각해. 왜 늙은 여자는 섹스를 원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그 방법은 모두 돈이라는 절대 권력을 통해 이뤄진다. 만약 <돈의 맛>에서 백여사의 이런 섹스 묘사를 조금 더 많이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했다면 그건 백여사 개인의 것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돈의 맛>에서 백여사의 섹스신은 오로지 한차례에 등장한다. 그것은 늙은 여자의 섹스를 보여주기 위함보다는 돈이라는 권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언제쯤 우리는 이 금기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늙은 여자의 성적욕망. 여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를 연기하는 김혜자와 윤여정이 가세했다. 그러나 미진하다. 여전히 갈 길이 없다. 로저 미첼의 <마더>는 2003년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남편을 떠나 보낸 어머니가 등장한다. 딸의 남친을 보고 욕망하는 늙은 여자의 몸. 우리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임상수가 돈의 3부작을 완성시킬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한번 다음에 늙은 여자의 몸에 대해서 <처녀들의 저녁 식사>(1998)처럼 담백하고 발칙하게 이야기하길 원한다.

+ <돈의 맛>을 보고 돈의 본질, 세계에 대해 눈을 뜬 젊은 관객들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와 코언 형제의 <파고>(1996)를 보길 권하고 싶다. 더불어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2008)와 파올로 소렌티노의 <일 디보>(2008)도 챙겨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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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대한 환상

곧바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자꾸 쉬게 되거나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될 때가 있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끼어드는 문제들을 보면서 한동안 무기력했다. 변하지 않는 문제는 처음부터 변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와 관련된 누군가는 자신의 눈이 아닌 서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틈은 제 3자에 의해서 밝혀졌지만 이내 곧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그들 스스로 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이든 환상이든 그들은 함께 한 지금까지의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일까. 언젠가 그 집착은 또다시 진실에 닿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 진실을 두고 또다시 흔들릴 것이며 자신이 선택할 것들이 없었다며 체념하고 또다시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진실은 그들 가까이에서 서성이며 밤의 유령처럼 찾아들 것이다. 

몇번을 되풀이해서 신중하게 검토해야할 일이 감정에 의해 터져버렸다.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잠시 떨어져 있기로 마음 먹었다. 이건 끝이 아니야 라고 멀어졌으며 간혹 서로가 그리우면 남자는 여자를 찾아간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끝내 인정하지 못하고 현재의 관계가 최선인 것처럼 군다. 어차피 그들은 또다른 뭔가를 금방 찾아낼 것이다. 몇년간 지속되었던 그들의 관계는 허약했다. 그들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동거는 사람들 말처럼 서로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남녀의 이상적인 연애 공부가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여러번 거치고 나면 더 성숙해진다고. 아니다. 사랑할 마음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 몸도 마음도 점점 그런 것들과 멀어지게 된다. 혼자만 누울 수 있는 싱글 침대의 아늑한 자유가 그들에게 남겨졌을 뿐이다. 

끝을 쉽게 말해버렸다. 그냥 입 밖으로 나왔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급류를 타고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오랫동안 서로가 꺼내지 못하고 숨겨왔던 것인지 모른다. 믿음을 시험할 때 과연 시련 없이 통과할 수 있을까. 믿음을 물어볼 때 이미 균열을 시작된 것이다. 믿음이란 서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면 질문을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묻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당신은 결론을 짓고 있는 것이며 끝에 대한 이상한 희열과 불안 그리고 환상을 품게 된다. 그러나 끝이 나면 당신이 기다리는 그것이 존재할까. 정말 거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사람들은 현재의 불만을 쉽게 끝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끝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기에 당신의 현재의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리석은 것은 상대일 뿐이라고 망상하면서 자신의 것은 보지 못한다. 믿음을 물어보고 난 다음 언제나 마음 속 회의와 의구심을 떨쳐내기 위해 불안해진다. 그 불안함은 또다른 믿음을 요구할 것이며 그런 관계는 상대를 질식하게 만든다. 인간적인 것을 요구하면서 상대에게 어려운 조건을 내건다. 어리석은 것은 누구인가. 신뢰할 수 없는 실수를 저버리는 상대인가. 아니면 그것을 묵인하다 터트린 자신인가. 끝을 쉽게 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현실의 무게감을 당신은 오늘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책임져야 할 것들에 질식한 건 상대가 아니라 당신의 허약한 믿음이다. 당신이 먼저 깨져버렸기 때문에 관계의 균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끝을 원한다. 끝을 희망하고 중단되길 원한다. 그러나 진정 그 끝을 원한다면 끝나고 난 다음의 시작에 대해서 충분히 준비해야할 것이다. 일단 시작되고 나면 끝없는 시작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작을 진정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람들이 왜 같은 실수를 두 번 이상 저지르는지 아는가.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각성과 반성 그리고 인식 없이 이뤄진 관계의 끝은 똑같이 반복될 뿐이다. 현재를 봐라. 진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상 늘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면서 상대를 비난하며 오늘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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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인터내셔널 버전 포스터

지난번 <프로메테우스>의 새로운 포스터를 올리면서 불충분하게 이야기했어요. 다시 말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제대로 하자 하면서 미뤘지요. 그때부터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거든요. 속으로 제발 새로운 포스터는 올라오지 않길 기대했어요. 미루긴 했지만 자신 없었거든요. 어제 시간이 되어서 <프로메테우스> 공식홈과 페이스북에 올라온 정보들을 보았는데 정말 흥미롭더군요. 이미 많은 팬들이 보셨으리라 믿어요. 6월 6일 직접 영화를 확인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되는데요.

왜 이 포스터를 올리냐 하면 Tumblr에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더군요. 너무 간단하지만 진짜 정확했어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저도 올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공개되었던 다소 모호한 포스터에 비해서 이 포스터야말로 진짜 시작이 지금부터라고 선언하는 것 같거든요.

리들리 스콧 감독이 <프로메테우스>는 기존의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이 아니라고 인터뷰한 동영상을 봤는데 넌센스라고 생각되어요. 왜냐하면 <에이리언>의 프리퀄이 아니라면서 너무 흡사한 아이디어와 구조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물론 에이리언의 인류의 조상인가를 묻는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인 것 같고. 한편으로는 에이리언의 모습이 인간 남성의 성기를 닮아서 은근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에서 과연 그런 미스터리를 풀어줄 수 있을지... 기대해도 될까요. 최대한 사실에 근거를 둔 SF 영화라고 하니 인류의 기원과 뜻하지 않는 새로운 종과의 만남이라는 진부하고도 또 언제나 흥미로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어요. 히어로가 난무하는 지금의 극장에서 뭔가 성숙하고 진짜 끝내주는 전율의 미스터리 호러 SF를 만나고 싶은 것만은 사실이에요. 아이맥스 3D로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더 증폭되는 군요. 아이맥스 화면으로 만나는 에이리언. 진짜 끝내줄 것 같은데요.

이미지 출처: impaward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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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23번째 영화 <007 스카이폴> 티저 포스터 공개


일주일 전 <007 스카이폴>의 스틸 사진들을 포스팅하려다 말았어요.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가장 큰 이유는 스틸만으로 과연 이 영화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대니얼 크레이그의 멋진 슈트와 몸매를 볼 수 있는 남성복 카탈로그 같았거든요. 또는 남성잡지안에 실린 고가 브랜드의 광고 사진이거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어느덧 대니얼 크레이그의 짐승남 버전의 세번째 본드 영화가 나오게 되었어요. 처음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가 된다고 했을 때 기존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발이 심했지요. 그게 벌써 6년전 이야기가 되겠군요. 007 21번째 영화 <카지노 로얄>(2006)은 이제껏 봐왔던 최첨단 무기와 올드한 냉전 시대의 첩보물과 거리가 멀었어요. 시리지의 프리퀼에 해당되는 시기를 다뤘고 정교하게 세련되기 전의 본드가 가진 순수한 야성을 보여줬죠. 그가 가진 인간적 트라우마에 대해서 건드렸고 동시대의 첩보 영화와 비슷한 실감나는 액션의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오래된 시리즈가 가진 낡은 관습을 버리면서 오히려 사람들이 원했던 고상한 기품이 살아났죠. 새롭게 환골탈태한 마틴 캠벨과 대니얼 크레이크의 제임스 본드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시리즈로 거듭났어요. 

여기에 007 22번째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2008)의 감독은 액션 영화와 거리가 먼 마크 포스터가 맡으면서 보다 정적이면서 복잡한 내러티브를 가진 후속편으로 거듭나죠.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기존의 것과 거리가 멀었고 하나의 코드로 따라가면서 지적인 게임을 즐기길 원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전작 <카지노 로얄>의 후속편으로서 베스퍼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가 사랑한 남자를 찾아나서는 본드의 여정을 그렸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지요. 어떻든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본드는 어떻게 냉혹한 킬러 요원으로 변해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줘요. 액션 영화의 쾌감을 얻었던 <카지노 로얄>의 팬이라면 다소 난해하고 심각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적여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어요.

그리고 007 23번째 영화 <007 스카이폴>(2012)의 감독은 무려 샘 멘더스로 결정되죠. 마크 포스터와 샘 멘더스는 <연을 쫓는 아이>(2007)로 감독과 기획으로 이미 인연을 맺기도 했어요. <007 스카이폴>은 샘 멘더스에게 8번째 연출작이 되죠. 성공적인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1999) 전에 2편의 텔레비전 영화를 만들었고 <로드 투 퍼디션>(2002), <자헤드 그들만의 전쟁>(2005),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어웨이 위고>(2009)까지 십년 동안 5편의 영화를 연출했어요. 모두 일정한 수준을 갖춘 영화들이고 무엇보다 가족 드라마에 능하고 인물 묘사에 탁월했죠. 전개 방식 역시 고전적이면서 스토리가 탄탄했어요. 전장 드라마와 누아르 그리고 코미디 드라마라는 장르의 폭도 넒히기도 했지요. 케이트 윈슬렛과 이혼한 이후 한동안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 같았지만 <007 스카이폴>은 그에게 새로운 영화 열정을 심어주기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퀀텀 오브 솔러스> 이후 4편이 흐르는 동안 새로운 007 시리즈의 히어로 대니얼 크레이그는 본드가 아니더라도 이제 전세계에서 통하는 일류 스타가 되어갔지요. 처음 대니얼 크레이그를 보게 된 것이 <툼 레이더>(2001)였지만 각인되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2년 후 출연한 <마더>(2003)에서 한 눈에 들어오게 되었죠. 전형적인 영국 배우 같았어요. 특별한 미남은 아니었지만 영국 배우들이 갖는 개성이 도드라졌고 동시대 미모의 남자 배우에게서 찾을 수 없는 터프한 남성미가 흘렀죠. <카지노 로얄>(2006)까지 오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영화로 작용할만한 작품이 있었다고 보지 않아요. <실비아>(2003), <엔듀링 러브>(2004), <뮌헨>(2005). 

그러나 <레이어 케이크>(2004)는 주목할만하죠. <킥 애스: 영웅의 탄생>(2010)과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로 확실히 성공한 매튜 본의 데뷔작으로 마돈나와 결혼한 후 총기를 잃어버린 가이 리치의 <록 스타 앤 투 스모킹 배럴스>(1998)와 <스내치>(2000)로 이어지는 영국 영화 특유의 누아르 계보를 잇는 작품이었어요. 이 영화를 기점으로 후에 마틴 맥도나흐의 <킬러들의 도시>(2008)로 이어지고 같은 주인공 콜린 파렐의 또다른 영화 <런던 블러바드>(2010)로 이어지죠. 또 <락큰롤라>(2008)로 가이 리치는 사고뭉치 갱스터들이 나오는 본래의 자신의 영화로 컴백하게 만들죠. 언급한 영화들 비교하면서 보면 꽤 재미 있을 겁니다.

2011년 라이언 고슬링, 맷 데이먼, 조지 클루니도 여러 작품에서 동시에 개봉시켰고 자신들의 역량을 최고조로 이끌었지만 그들과 함께 언급할 수 있는 남자 배우로는 대니얼 크레이를 꼽지 않을 수 없어요. <카우보이 & 에이리언>,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드림 하우스>까지 존 파브로, 해리슨 포드, 올리비아 와일드, 샘 록웰, 폴 다노, 짐 셰리단, 레이첼 바이즈, 나오미 왓츠, 스티븐 스필버그, 제이미 벨, 데이빗 핀처, 루니 마라까지 그가 한해 동안 얼마나 많은 영화에서 뛰어난 영화인들과 작업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주죠.

그리고 난 다음 3번째 제임스 본드로 복귀하면서 공개된 <007 스카이폴>의 티저 포스터를 보세요. 단순명쾌하죠. 특별한 것도 없어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007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확인하게 되죠. 그 상징성. 이제 그는 베스퍼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요. 본 궤도에 오른 제임스 본드로 그는 환골탈태한 것일까요.

샘 멘더스와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 23번째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주디 덴치를 비롯 너무나 막강한 레이프 파인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알버트 피니가 나옵니다. 대니얼 크레이그 못지 않게 이번에 강력한 남자 배우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배우 명단만 보자면 가장 지적인 본드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군요. <007 스카이폴>은 11월 9일 북미 개봉 예정입니다. 

이미지 출처: 야후!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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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드 팔마와 레이첼 맥애덤스의 신작 스릴러 <패션> 포스터 공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오랜만의 신작 소식이에요. <리댁티드>(2007) 이후니까 거의 5년만이군요. <블랙 달리아>(2006)가 개봉된지도 거의 그 즈음인 것 같고요. 찾아보니 2007년 11월 11일에 개봉되었어요. 1940년생이니 올해 한국 나이로는 72세가 되겠군요. 과연 신작 <패션>이 어떤 스릴러가 될지 궁금한데 공개된 시놉은 너무 단순해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보스와 멘토에게 살인으로 복수하려는 젊은 여성 사업가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 간단한 스토리에서 과연 브라이언 드 팔마가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요.

사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신작이라서 반가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이 작품에 두 명의 여배우가 나온다는 것이 놀라워요. 레이첼 맥애덤스는 한동안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에만 전념하다 오랜만에 스릴러 장르로 돌아왔어요. 제 개인적으로나 그녀의 경력상으로나 마찬가지로 스타이자 배우로서 발돋움하게 만든 결정적인 영화는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 플라이트>(2005)였어요. 킬리언 머피도 멋졌지만 단연 레이첼 맥애덤스의 배우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이 영화로 확인하게 되었죠. <노트북>(2004)과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과 같은 그저 예쁘고 친근한 금발소녀로 소비될 자신의 이미지를 깨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제 2의 줄리아 로버츠를 잇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성장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아직 강력하지 않지만 올 봄에 개봉한 <서약>(2012)같은 드라마는 북미 박스오피스 1억불 이상 벌어드렸지요. 최근의 줄리아 로버츠나 톰 행크스와 같이 특수 효과 없이 연기만으로 버텼던 빅스타들의 흥행 수익과 비교하면 대단히 놀라운 성적이라 할 수 있지요. 여하튼 나름대로 준수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레이첼 맥애덤스가 스릴러로 돌아왔고 그 작품에는 브라이언 드 팔마와 <밀레니엄> 스웨덴 버전의 시리즈의 헤로인인 누미 라파스가 참여해요. 그러니 이 작품이 단순한 두 톱 여배우가 나오는 전형적인 스릴러로 머물지 그 이상이 될지 기대반 걱정반일 수 밖에 없지요.

<밀레니엄> 시리즈로 일약 전세계의 스타덤에 오른 누미 라파스는 불운하게도 자신이 공들여 완성한 리스베트라는 초강력한 여성 캐릭터의 인기를 데이빗 핀처가 리메이크한 미국 버전의 루니 마라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전세계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리스베트는 이제 그녀의 것만이 아니게 되어버린 거죠. 더욱 할리우드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감독으로 손꼽히는 데이빗 핀처를 만났으니 루니 마라의 리스베트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오게 된 거죠.

그렇지만 스웨덴 버전의 '리스베트' 누미 라파스를 잊을 수 있을까요. 미국 버전의 루니 마라가 연약한 여성성을 강조하고 더 패셔너블하게 리스베트를 그려냈다면 누미 라파스는 그런 외형성에서도 좀처럼 확연한 그림이 잡히지 않는 모호함과 불균질적인 매력으로 캐릭터를 완성해가요. 그녀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야성이 존재하죠. 불같은 성격과 대조되는 상처받은 영혼에 대해서도 루니 마라가 흉내낼 수 없는 자신의 것을 이미 완성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패션>은 누미 라파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 뭔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껴지네요. 그렇지만 누미 라파스는 <밀레니엄> 시리즈의 성공으로 곧바로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되죠. 이미 개봉했던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2011)에서 집시 여인으로 등장했지만 그녀가 가진 매력을 이 영화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웠어요. 곧 개봉될 리들리 스콧의 SF 초기대작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녀의 두번째 할리우드 영화를 만날 수 있겠지요. 어떻든 가이 리치, 리들리 스콧, 브라이언 드 팔마와 같은 대 감독들과 작업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니까요.

<패션>의 스틸 중 레이첼 맥애덤스와 누미 라파스가 키스하는 장면이 있는데 즉각적으로 워쇼스키 남매의 데뷔작인 <바운드>(1996)가 생각나요. 누미 라파스가 묘하게 지나 거손처럼 중성적인 매력이 있죠. 그러고 보면 브라이언 드 팔마와 폴 버호벤도 비슷한 구석이 많죠. 노골적인 폭력과 섹스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스릴러 감독이라는 것도 그렇고요. 지나 거손 하니까 갑자기 <쇼걸>(1995)이 떠오르기도 하고.

<패션>을 보자마자 떠오른 영화들이 <바운드>(1996), <쇼걸>(1995), 바벳 슈로더의 <위험한 독신녀>(1992), 샤론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의 <디아볼릭>(1996) 등이 있어요. 거의 비슷한 감독과 여배우들이 중첩되는 군요.

아무튼 브라이언 드 팔마가 부디 이 두 여배우를 <블랙 달리아>(2006)의 스칼렛 요한슨과 힐러리 스웽크처럼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팜므 파탈>(2002)의 레베카 로민처럼 매력적으로 그려냈으면 좋겠어요.

현재 imdb에 올라온 정보로는 2013년 2월 21일 네델란드에서 처음으로 개봉된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beyondhollywoo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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