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게 만드는 결정적인 것은 내 경우는 완벽한 걸작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결국 단 하나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영화에서 발견하길 원하는 것이다.
<돈의 맛>의 성인용 예고편을 보고 짐작하기엔 허세가 심하겠군요 라고 판단했다. 임상수가 노골적으로 세속적인 표현을 쓰며 '떡' 전문 감독임을 강조할 때부터 그의 영화가 이상하게 이물감이 심한 느끼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지도 않는 영화 <돈의 맛>에 대해 '본격 떡 영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도 되겠다고 장담했다. 예고편에 흐르는 대사의 직접적인 노골성을 봐라. 얼마나 번지르르한가. "가만 있어"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하세요. 어디 안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윤여정부터 김효진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니 있는 대로 허세를 부린 포스터와 예고편 그리고 언플로만 보면 <돈의 맛>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아니 상상한 그대로를 보여주는 최상류층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는 본격 떡 영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돈의 맛>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들 수 밖에 없는 낭패감은 돈에 대한 경험의 부재 아닐까. 소시민이 매달 겪는 고충의 돈의 액수가 이 영화에서는 통할리 없다. 조단위의 돈이 입밖으로 오고가는 상황에서 과연 그 액수를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또는 과연 조라는 단위의 숫자를 실감할 수나 있겠는가. <어벤져스>의 현재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정도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체감할 수 있을까. 어렵다. 그 한계가 명백하니 이 영화를 볼 진짜 타켓은 영화와 같은 몇 프로에 해당되는 최상류층일지 모른다.
<돈의 맛>은 상상력이 부족한 영화다. 오히려 누구나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문제는 감독이 그것을 관객에게 지켜보게 해줘도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불감증에 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돈의 맛>에서 더 자극적이고 대담하게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서 폭로하는 방식으로 그렸다면 관객들이 원하는 신파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에 흔들릴 관객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단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다시 말할 때 그 이야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무시무시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당해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그저 남일처럼 구경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임상수 영화는 한 장면을 집요하게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돈의 맛>에서도 몇 장면을 오래 끌었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여지없이 커트하는 임상수만의 방식.
나는 여기서 <돈의 맛>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나 최상류층의 부도덕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다고 여긴다. <돈의 맛>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돈의 맛>의 화자가 누구인지 감독의 누구에 편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조금 더 근사하고 멋지게 캐릭터가 잡혀있는 백금옥, 백여사(윤여정)과 윤회장(백윤식)을 보여주기 <돈의 맛>은 낭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엔딩의 두 인물 주영작(김강우)와 윤나미(김효진)을 끝까지 따라간다. 엔딩이 삭제해야하는 낭비였을까. 쿨하지 못한 감독의 결정이었을까. 요즘 관객들은 그런 것 쯤은 눈 감고도 알만한 정말 쿨한 상태인가.
나는 엔딩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돈의 맛>을 본 상영관이 제일 후진 곳이었고 스크린이 작은 관계로 4번째 줄 중앙에 앉아 최대한 스크린과 가깝게 영화를 봐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작의 얼굴에 쏟아지는 비에 눈을 뜰 수도 없는 상태가 여러번 잡힌다. <돈의 맛>의 수많은 대사와 공들인 화면의 미쟝센보다 오히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닌가 싶었다. 비는 왜 내리는가. 관습적이고 진부하지만 한국에서 돌아와야 하는 엄마 에바(마우이 테일러)를 기다리는 필리핀의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비는 쏟아져야 한다. 그러나 비가 꼭 그 아이들의 마음만을 표현해준 것일까.
영작은 최소한의 양심으로 자신들이 빠져들었던 돈이라는 늪에서 나오기 위해 필리핀행을 떠난다. 영작의 마음을 헤아린 나미는 뒤따라 와서 동행자가 된다. 영작이 에바의 관을 실고 도착한 아이들은 탁아소인지 고아원인지 불분명한 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에바의 딸 아이는 간단한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상태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영작은 모든 것을 나미에게 맡긴 채 그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서있을 뿐이다.
영작은 왜 필리핀으로 향한 것인가. 그는 잠시나마 빠져있던 그곳을 벗어나 조금이나마 죄의식에서 벗어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도한 곳의 현실을 보자 그조차도 자신의 오만이자 사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는 행위에 대해 대신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아니다.
비는 아이들을 위해서 내린 것이 아니다. 영작을 두드리는 세찬 비는 그에게 밴 돈이라는 오물을 씻겨내기엔 역부족이다. 차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이 내리는 빗줄기임에도 영작은 분명 그것을 그 순간 인식한다. 나는 깨끗해질 수 있을까. 나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여전히 <돈의 맛>은 개운하지 않다. 나미는 그들 가족에 비해서 돈에 덜 오염된 인물이지만 그녀는 괜찮은가. 그녀는 얼마나 그들 가족과 다를 수 있는가.
필리핀으로 오면서 나미와 영작은 비행기 화장실에서 입은 채로 섹스를 한다. 영작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반쯤은 돈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방금 떠나온 그 세계의 인물과 몸을 또다시 섞는 것이다. 이건 안전한가. 믿을 수 있는가.
<돈의 맛>의 약점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 윤회장은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필리핀 하녀 에바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만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이 장면은 등장하는데 아직 윤회장과 에바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 시점이다. 이 장면만 두고 보자면 이 가족들은 윤회장의 손버릇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으면서 묵인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외국인 하녀의 육체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언제든지 범할 수 있는 대담무쌍한 가족들의 풍경. 그렇게 그 장면은 읽혀지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윤회장은 깨우침을 얻는 것처럼 소박한 에바와의 사랑을 원한다. 여기서 타자에 속하는 에바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정력가인 윤회장과의 섹스에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로 그려지고 그녀는 자신의 학벌과 상관 없이 이 사랑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필리핀에 있는 자신의 두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이라면 감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영작과 나미에게 이야기한다.
에바는 정말 윤회장의 입장과 동일한가. 알 수 없다. 에바야말로 임상수의 <하녀>의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이용당하고 즐기고 스스로 화형 당하는 은이(전도연)과 비슷한 맥락으로 자본가와 몸을 섞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임신을 한다.
팀 버튼의 <다크 섀도우>(2012)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2세기를 관에 감금되었다 풀려난 바나바스 콜린스가 피에 굶주려 1970년대 히피들 무리에 끼었을 때 여자가 원하는 것이 양과 돈이었다는 자신의 시대에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겠냐고. 바나나스 옆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맹한 눈동자의 소녀는 여자는 남자의 사랑이면 그만이라고 대답한다. 히피 무리들은 일제히 동조한다.
그렇다면 에바는 윤회장의 식탁에서의 손버릇과 가족들이 뻔히 있는 대저택에서의 은밀한 섹스가 여성으로서 온당하다고 여겼을까. 윤회장의 방식이 사랑받는 여자가 받을만한 행동이었다고 보는가. 물론 이 관계에서 에바가 윤회장을 사랑했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윤회장이 그보다 더 한 것을 요구해도 그들의 계급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이런 남자들의 여성혐오적인 사랑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맛>의 진짜 주인공은 백여사가 살고 있는 대저택이다. 나미의 입을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타 죽은 하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200조가 넘는 돈을 가진 자본가가 사는 주택의 역사다. 여기는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빠져나가기 힘든 돈이라는 지옥의 세계다. 돈에 감금된 대저택은 고가의 미술품이 전시된 갤러리의 모습을 띄고 있고 바닥은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근사하게 실내의 온도를 유지하는 벽난로부터 고가의 가구들로 진열되어 있다. 그들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최대치의 것들을 보여주고 그것에 철저하게 종속된 삶을 산다. 그래서 백여사도 윤회장도 윤철(온주완)도 특별한 악인의 포스를 풍기지 않는다. 백여사의 아버지 노회장(권병길)이 쓰는 언어가 일본어이고 백여사 집안에서 한국어와 반반으로 섞어쓰는 언어가 영어인 점만 보더라도 이들의 사고방식은 한국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관습에 얽매이는 기존의 한국 가족의 답답함이 쿨하게 보여지기도 하고 다른 점에서는 실감할 수 없게 대담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일본어를 쓰는 거동이 불편한 유령이나 다름없는 노회장을 보면서 부의 축척의 역사가 일제 식민지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의 부만 축척한 남자의 유일한 상속작가 딸이라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녀>(2012)에서 자본의 권력을 움겨쥔 절대적인 인물은 훈(이정재)이었다. 남자였단 말이다. 왜 한국 자본가를 추적한 연작 <돈의 맛>에서는 그 상속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을까. 대선을 앞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슬며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한국 근대사 유령과 같은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누군가를 빼닮았다. 백여사는 자본을 지켜내기 위해 능력 좋은 남편 윤회장과 결혼하지만 돈의 모욕을 느낀 윤회장은 외도를 통해 그 돈으로 백여사에게 모욕감을 심어준다. 돈과 거래한 현대판 한국의 파우스트라 할 수 있다. 백여사의 프라이버시한 섹스 라이프는 그들이 부리는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을 슬쩍 건드리면서 유지된다. 주영작은 백여사가 윤회장의 외도로 외롭고 불행한 늙은 여자일 뿐이라고 위장한 거미줄에 걸려든 힘없는 벌레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여사의 삶을 보자.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대저택에 감금된 인물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교육받은 후계자가 아닌가. 돈을 지키내고 있는 파수꾼으로서는 유능하나 자신의 아랫도리를 간수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쩌다 일하는 젊은 남자를 건드리고 그들을 자신이 사업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다. 완전히 여왕벌같지 않는가. 백여사 가문이 이끄는 대기업의 총수들은 모두 그녀와 동침한 전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섹슈얼리티를 상실한 이 가문의 불행은 나미에게로 되물림된다. 결혼하고 20번 정도 섹스를 나눈 것이 고작인 30대 중반의 나미는 그녀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엄마와 이미 몸을 섞은 남자들을 유혹한다. 이 모녀들에게 돈을 넘쳐날지 모르지만 자신을 보호해줄 진정한 남자는 없다. <돈의 맛> 백여사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확실한 것은 그녀는 독실한 아버지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사랑받길 원하는 굿 걸. 사랑을 원하는 데 아버지는 돈을 주고 그녀는 돈을 지켜내기 위해 사랑을 산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적인가 라는 질문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마도 가장 극지점에 위치한 것이 에바의 죽음일 것이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흔들리는 영작에 대한 협박과 고문일 것이다. 얼마든지 너하나쯤은 모르게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권력. 그 무시무시함은 영작의 얼굴을 비닐로 쓰인 채 김기영의 <하녀>가 뒤쪽의 스크린에 상영되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른쪽 광대뼈의 상처와 입술의 찢어짐. 숨막히는 공포를 제대로 구현해냈다.
영화 <돈의 맛>은 그 돈으로 살고 그 돈을 지켜내는 자본가의 모습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에 대해서 질문해봐야 옳을 것이다. 백여사의 대저택. 그 안에서는 살인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죽음이 이미 만연된 공간이다. 죽음은 언제나 쉽게 처리되는 곳.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물들이 사는 곳. 자신들이 사는 그 고상하고 우아한 공간에서 죽음은 일사천리로 일어진다는 사실.
에바가 실내 풀장에서 죽어 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절대 권력의 백여사는 몸서리 치게 악마적이다.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의 남편을 빼앗은 여자의 죽은 육체 앞에서 당당하게 위세를 부린다. 거기에는 공포도 없고 최소한의 존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돈의 맛에 길들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면역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다.
임상수의 <돈의 맛>의 탁월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돈의 맛을 어떻게 보여줬냐고. 돈의 세계가 죽음으로 통하는 직접적인 통로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돈은 곧 죽음을 뜻하고 그 죽음에 취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온다. 돈이 돈을 모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죽게 만들고 더 많은 죽음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척이란 결국 사람들의 피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달간 해외에서 머리를 식히고 오면 받아주겠다며 돈봉투를 건네는 백여사의 제의를 물리치는 영작은 말한다. '질식해버리겠다'고. 영작은 산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와 가까이하는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돈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말하는 윤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에바와 외도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나려 했지만 백여사에게 발이 묶이게 된다. 그는 다시 백여사의 저택으로 돌아가 그 자신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목에 칼을 그은 채 욕조에 몸을 담근다. 결국 그의 장례식은 그 대저택에서 치뤄진다. 그의 몸과 영혼이 영원히 그 대저택에 감금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란 말인가.
<하녀>처럼 특유의 임상수의 방식으로 <돈의 맛>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눌러담고 재차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면서 영화를 끝마쳤다.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그 악취를 과연 씻겨낼 수 있을까. 그 남자에게 과연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작은 세찬 비를 받고 필리핀의 고아가 되어버린 두 아이 앞에 서 있다. 이제 그 남자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돈의 맛>은 끝까지 영작에게 묻고 있다.
다시 <하녀>의 은이(전도연)로 돌아가보자. 임상수는 <하녀>(2010)의 마지막에서 은이가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고 죽는 장면을 넣었다. 전후 맥락을 보더라도 이 장면은 좀 느닷없이 끼어맞춘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다. 왜 은이는 자신이 몸에 불을 질렀을까. 자살하는 여러가지 방법은 그녀는 여기서 두가지를 선택한다. 하나는 목 매달려 죽는 것이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흡사 중세 시대의 마녀의 처형 방식과 동일한 이 방법을 왜 은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돈의 맛>에서 윤회장(백윤식)은 그 은이가 죽기 직전에 몸을 담았던 욕조에 앉아 손목을 긋는다. 자신의 피로 몸을 담그면서 그의 몸에서는 모든 피가 빠져 나간다.
왜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속죄인가. 또는 무엇을 부인하는 행동인가.
은이는 자신을 농락한 훈과 그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흡사 훈의 가족들이 바라는 대로 은이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왜 은이는 자신의 몸에 극심한 고통을 주며 죽음을 불사르는가. 그녀는 충분히 깨닫지 못한 백치처럼 <하녀>에서 그려진다. 그녀의 이전 삶이 어떻든 상관없이 은이는 훈의 저택에서 삶을 즐기는 듯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충분히 훈이 상징하는 세계의 속성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그 세계의 맛을 훈과의 섹스를 통해서 즐겼기 때문이다. 훈이 원하는 대로 그 세계의 쾌랙을 맛 본 자신. 그들이 벌하기 전에 자신을 벌해야 한다고 깨달은 은이. 그래서 자신의 몸에 밴 그 쾌락의 진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죽지만 내 육체는 불로 그 죄를 씻겨낼 것이라는 선언. 은이는 죽음의 방식을 통해서 그녀 스스로에게 구원의 기회를 준다. 가장 끔찍한 형벌로서.
그러나 이 '하녀'의 은이의 죽음은 윤여사 가족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돈 앞에서는 한맺혀 죽은 여자 귀신조차도 무기력할 뿐이다. 그 죽음을 계기로 이 대저택에 들어온 자들. 돈이라는 악과 거래한 사람들은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하녀>와 <돈의 맛>은 연속적으로 돈이라는 본질에 대해서 묻고 있다. 죽음을 불러내는 돈의 세계는 지옥을 허락한 공포 그 자체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 <돈의 맛>의 주영작(김강우)은 그 죄를 씻기 위해 필리핀으로 간다. 한국 자본가의 거대한 돈은 아시아의 후진국에 속하는 필리핀의 하녀에게까지 이제 손을 뻐친 상태다. 과연 돈의 위력이란 이런 것이다. 거기서 주영작은 기적처럼 비를 만난다. 이미 그 세계를 빠져나왔다고 믿었지만 그 스스로에 대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주영작은 자신의 몸을 때리는 비를 통해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이 남자는 살아가야 한다. 돈 없이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주영작이 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돈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딸 나미와 떠나버린 주영작을 바라보는 돈의 늙어빠진 몸뚱아리가 있다. 백여사(윤여정). 한국 영화에서 늙은 여자의 섹스에 대해서 그린 작품이 많지 않다. 늙은 여자의 섹스는 언제나 이 사회에서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금기의 것이었다. 봉준호의 <마더>(2009)에서는 늙은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계급과 어머니(김혜자)라는 관점으로 풀어냈다. 엄마가 섹스를 원할 때 그 자리에는 죽음이 도사린다. 왜냐하면 엄마의 섹스를 상상하는 아들에겐 그것이 금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급적으로 작은 시골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모자의 이야기로 그려진다면 더이상 가망이 없다. 그 금기는 모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산 자의 지옥같은 이생. 그러니 미쳐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돈으로 세상과 사람을 살 수 있는 <돈의 맛>의 백여사에게 섹스는 무엇인가. 그녀는 쉽게 젊은 남자와 몸을 섞는다. 모르는 척 은근히 젊은 남자들에게 말한다. 니들이 하는 원 나잇 스탠드라고 생각해. 왜 늙은 여자는 섹스를 원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그 방법은 모두 돈이라는 절대 권력을 통해 이뤄진다. 만약 <돈의 맛>에서 백여사의 이런 섹스 묘사를 조금 더 많이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했다면 그건 백여사 개인의 것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돈의 맛>에서 백여사의 섹스신은 오로지 한차례에 등장한다. 그것은 늙은 여자의 섹스를 보여주기 위함보다는 돈이라는 권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언제쯤 우리는 이 금기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늙은 여자의 성적욕망. 여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를 연기하는 김혜자와 윤여정이 가세했다. 그러나 미진하다. 여전히 갈 길이 없다. 로저 미첼의 <마더>는 2003년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남편을 떠나 보낸 어머니가 등장한다. 딸의 남친을 보고 욕망하는 늙은 여자의 몸. 우리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임상수가 돈의 3부작을 완성시킬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한번 다음에 늙은 여자의 몸에 대해서 <처녀들의 저녁 식사>(1998)처럼 담백하고 발칙하게 이야기하길 원한다.
+ <돈의 맛>을 보고 돈의 본질, 세계에 대해 눈을 뜬 젊은 관객들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와 코언 형제의 <파고>(1996)를 보길 권하고 싶다. 더불어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2008)와 파올로 소렌티노의 <일 디보>(2008)도 챙겨보시길!
at 2012/05/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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